니체의 도덕 규범 윤리학

2023. 10. 9. 13:53카테고리 없음

니체의 도덕규범 윤리학

 

1, 유대교 구약성서의 윤리사상

 

신이 낙원을 창조하고 사람을 거기에 두었을 때 "낙원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돋아나게 하셨다" [창세 29]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이 선악을 빼고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야훼는사람의 조상에게 일체의 자유를 허락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했다. “안다는 것은 지배 한다는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악을 스스로 결정해서는 안 되고, 신이 정한 선악을 존수해야 한다는 점이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이자 유대교 율법의 기본사상이었다.

 

신명기 개혁 이후 유대교의 교단 적 성격이 강해졌고 종교적 유토피아 사상 가운데 민족에게 고유한 윤리가 그대로 신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신과 세상의 계약 [창세 13. 14-17]이라는 일반성은 사라지고 신과 유대인과의 계약이라는 민족 종교적 윤리사상의 한계가 생겨난다.

 

고대 그리스 그리스의 윤리사상은 철저히 인간적이며 범인류적이었다. 호메로스의 전장의 윤리, 헤시오도스의 평화의 윤리를 적은 [일리아스][일과 나날]을 배경으로 비극시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살려 최초의 본격적인 윤리학설을 내놓은 사람은 플라톤 이다. 소크라테스 의 도덕적 박력이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한다. 그들의 특색은 덕은 지[]이다라는 명제로 결정된다. 곧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아니면 덕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덕이 전달 가능한 기술지[技術知]라는 뜻에서의 지식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메논] 점이다. 하지만 덕이 anamn?sis의 지[]라는 것은 긍정한다. [메논] 덕이란 이데아에 사색적으로 도달하는 형이상학적 지식이라고 보아, 형이상학과 일치한 윤리학을 처음으로 확립했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가르칠 수 없는 그런 지식을 자기 자신도 찾고 남에게 권하려고 혼의 배려” [epimeleia t? s psych? s] [파이돈] 가 필요하다.

 

곧 이념적인 덕의 내적 이해를 위해 자타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며, 가시적 사물의 지식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이념의 이해를 통해 선의 이데아라는 최고의 존재에까지 정신이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플라톤의 윤리사상은 개인윤리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윤리로서의 국가학 또는 정치학에 귀결한다.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의 정욕으로 나누어지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도 이성에 해당하는 지배계급, 의지에 해당하는 방위계급, 정욕에 해당하는 직능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각자에 해당하는 덕이 지혜, 용기, 절제이다. [국가] 3가지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 가장 중대한 국가적 사업은 교육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윤리학설이란 개인윤리와 동시대에 대한 사회윤리로서의 정치학,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윤리학으로서의 교육학이라는 3가지를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덕 이론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다. 덕에는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적 덕과 습관으로 성립하는 습득적인 덕이라는 2종류가 있다. 후자는 모두 윤리적인 덕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들은 모두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본성을 배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본성 위에서 그 같은 덕을 수용할 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덕은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 같은 덕은 초과와 부족으로 상실되고 중용으로 유지된다. 그는 덕에서 지성적인 것과 습득적인 것을 나눈 것처럼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덕행은 별개라는 것을 플라톤의 정치적 실패로 분명히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스승의 '덕은 지[]이다'라는 명제에 이견을 내놓고 이론이성에서 실천이성을 분립시켰다. 그리고는 후자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선택으로써의 행위에 관한 계획적 능력이며, 개별적인 사안에 관계하는 덕이라고 했다.

 

2, 신약성서의 윤리사상

 

신약성서의 윤리사상은 그리스 사상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플리타네온의 향연[원로들의 집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 것,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랑스러운 마음이야말로 선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라고 말한 것과 같은 사상은 12사도의 가르침에 나오는 "너 자신을 높이지 말라"는 이야기나 사도행전 에페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자기를 걸인처럼 낮추는 생각, 곧 겸손이라는 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사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신조어이다. 곧 여기에 인간의 윤리적 태도로서 자기를 정당하게 자랑하기보다는 신 앞에 죄인으로서 스스로를 낮추는 태도야말로 새로운 가르침으로 주장되었다.

 

이는 서로 대립하는 사상이 나중에 그리스도교 윤리학으로 통합되는 이유는? [1, 양자 모두 인간의 행위가 내적인 의지에 의존하고, 2,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할 관계라는 점, 3, 서로 돕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3가지 공통점을 갖고 권익이나 이욕, 정욕과 같은 세속의 원리에 지배되는 종래의 세계관에 도전하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3, 고대 로마의 윤리학설

 

여기서는 특히 스토아학파 의 윤리사상이 중요하다. 이 학파의 창립자는 그리스의 제논인데 로마에 가장 영향을 준 학자는 파나이티오스 [BC 185~110] 이다. 이 학파는 자연법 을 존중하고 인간이 의지로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합치시키는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했다. 자연적인 생명에는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이상이므로 즐겁고 괴로움에 따라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곧 아파테이아 [apatheia]이고 이 부동심 외의 것은 아디아포라[adiaphora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부도 명예도 사치도 물리칠 것을 권했다. 이 생각을 이어받은 로마인이 키케로 이다. 그는 저서 [의무에 관하여]에서 스토아의 사상을 소개하며 "정의의 근저는 말과 약속에 대한 충실성, 거짓 없음 곧 진실성이다"라고 썼다. 키케로는 또 소크라테스보다도 로마인 카토 [BC 234~194]가 위대한 것은 후자가 단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라엘리우스. 우정에 관하여] 이로써 로마인이 도덕면에서 그리스인보다 위대하다고 선언했다. 이 사실은 "자연의 이치가 전 인류 사이에 정한 것은 모든 국민이 똑같이 지키고 모든 민족이 지키는 법으로서 만민법이라고 부른다." [가이우스 2세기]고 쓴 로마법의 계약과 자유를 존중하고 출생에 따른 차별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자 한데서도 나타난다.

 

4, 그리스도교 윤리학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전형은 중세 윤리학이다. 이 시대는 교부시대와 스콜라 철학의 시대로 나뉜다. 여기서는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해 서술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제는 자유의지와 은총의 관계이다. 저서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해서에서 "신은 정의이므로 악에 대해 악으로 갚는데, 이것이 벌이다.

 

다음으로 신은 선하므로 악에 대해 선을 베푸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불의에 대한 은총이다. 또 신은 선이고 정의이므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갚는데 이것이야말로 은총에 대한 은총이다"라고 생각함으로써 윤리신학의 기초를 닦았다. 토마스 아퀴나스 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인정된 자유의지가 이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오히려 철학적으로 추구했다. 이성은 필연적인 것에 대해서는 한 가지 결정밖에 못 하지만, 개인의 행위에 대한 이성의 필연적 인의적인 단정은 있을 수 없고 상반하는 길의 어느 것이라도 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을 전제로 했을 때 인간에게는 자유결정이 있어야 한다. [신학대전]고 했다. 윤리적 결단을 인식론적으로 증명했다. 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적 덕론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적 덕론을 체계화 했고 정의, 절제, 등의 주요덕목을 인간적 윤리덕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신에 대한 덕으로서 신앙, 희망, 사랑의 3가지를 들고 이들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 한 도덕생활에 기쁨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 근세 합리주의의 윤리학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시대에 새로운 윤리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나 르네상스의 특색은 예술이나 과학, 인문주의에 있고 종교개혁시대의 특색은 종교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근세 윤리학시대를 초래한 형이 상학자에 관해 논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명제를 기초로 형이상학을 수립한 르네 데카르트 는 완전히 기초 지워진 윤리학을 체계화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는 잠정적 도덕을 지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방법서설]

 

어느 의미에서 그의 비원(悲願)을 실현한 것은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신만이 유일한 실체라는 결정론적 범신론을 제창했으므로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되는데, 그는 자기보존의 충동으로서의 코나투스의 완전한 전개가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신의 지적인 자기애로 연결되는 것이다.

 

6, 근대 공리주의 윤리사상

 

자기애를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애로 환원해 일체를 이해로 찾음으로써 공리주의의 원조가 된 사람은 [정신론 De I'esprit]을 쓴 엘베시우스이다. 이 계열에서는 사람으로서 제러미벤담 이 가장 특색 있다. 그는 공리주의야말로 행위의 경향성이라고 보고 [도덕 및 입법의 제 윤리 서설] 그에게서 유래한 것은 아니지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제창했고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의 연결을 더욱 구체화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초기 오귀스트 콩트의 말처럼 실증과학인 사회학을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의 기초로 삼을 필요가 있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자연 상태에는 도덕성이 빠져 있다고 보는 장자크루소 의 사회계약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7, 관념론의 윤리학

 

시대적으로는 이들에 앞서면서도 이마누엘 칸트 의 윤리학은 인간에 대한 그의 존경심 때문에 오히려 현대에 연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명령이란 목적달성을 위한 상대적 수단에 관한 가언적[假言的] 명법[命法]이 아니라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률로 될 수 있는 것처럼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는 정언명법 [定言命法]이어야 한다. [실천이성비판] 따라서 주관적, 개별적인 행위의 준칙과 인류 일반에 타당한 객관적 보편적 명법의 통합을 지향한 G. W. F 헤겔 은 칸트가 자유의 개인적 실현에 머무른 데 비해 법철학요강에서 도덕성 위에 인륜의 단계를 세우고 그 최고 실현형태로서 국가를 상정했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며 민족정신은 각 민족의 자유에 관한 의식이므로 세계사는 탁월한 민족을 세계정신의 담당자로 삼아 변증법적으로 진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사를 자유의식의 전개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인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헤겔 자신이 어떻게 말하든 여기에는 완결 여부는 차치하고 역사적 필연의 사상이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헤겔 변증법이 프로이센 국가로 완결되는 것을 통렬히 비판하고 [포이어바흐와 고전철학의 종결] 무한발전 설을 택하지만, 역사의 논리를 믿는 한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에서도 개인의 자유는 역사적 필연을 향한 선구적 찬동과 같다. 따라서 아담 샤프는 "개인의 자유란 사회에서 개인의 제 권리를 말한다." [인간의 철학]고 써야 했고 윤리학의 기본문제로서의 인격의 자유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권리로 치환된다. 바로 여기서 거대한 산업구조로 모습을 드러낸 현대가 문제시되기에 이른다.

 

8, 인격의 자유

 

이 같은 사정을 예고한 사람이 F. W. J 셸링 이었다. 그는 자연과 정신이 대립하는 시대는 가고 "이제 더 높은 또는 오히려 진정한 대립이, 즉 필연과 자유의 대립이 나타나야 할 시대이다" [인간적 자유의 본질 서문]라고 말했다. "그 자체로는 자유이고 형식적으로는 필연이다", "절대적 필연성만이 절대적 자유이다."로부터 동일성의 결여가 인간에게 악의 가능성을 만든다고 제시했다. 그렇다면 선은 그 화합인 절대자에게만 완전하다. 따라서 인격의 자유인 이념으로서의 선을 동경하는 윤리학은 종교로 보완되어야 하고 셸링의 체계는 변신론을 찾게 된다.

 

그 같은 태도를 심하게 공격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그는 "그런 신은 인간의 작위이며 광태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하고 "선과 악 모든 것의 이름은 비유이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너의 의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의지로서 만물에 명령해야 한다고 바랄 때 여기에 네 도덕의 근원이 존재한다. 이 새로운 도덕 그것이 힘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국가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운동도 있었지만, 니체 본래의 주제는 선악의 근본적 반성에 있다.

 

마르틴 부버는 외적인 힘의 필연이 관리사회의 언어로서 나와 그것을축으로 성립했고 인격의 자유는 거기에 없으며 "나와 너의관계에서 "나는 인격으로서 발견하고 자기를 주체성으로 의식 한다." [나와 너]로부터 여기서 도덕의 기본인 "인격의 정신적 실체는 성숙해간다." [나와 너]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인격의 우위와 승리가 정신의 정점에 없다면 지구상에서 진보를 바랄 수 없다." [현상으로서의 인간]고 생각한 P. T 샤르댕 은 진화의 오메가로서 신에 수렴되는 방향으로 전체와 인격을 행위에 따라 통합하는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재평가했다.

 

9, 20세기의 윤리학

 

윤리학은 앞서 말한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영향력이 없는 작은 선을 이루라고 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규모의 규범적 권고에조차 절망하여 습속의 사실학으로서 과거나 변경의 행동유형이나 윤리의식에 관한 정보작성에 힘쓰게 될 것인가? "이 사태는 그 흐름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이 난관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일까? 나는 헛수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역사에서 숙명을 믿지 않는다. 충분히 긴장된 의지는 만약 적시에 행동한다면 어떤 장애라도 물리칠 수 있다." [도덕과 종교의 2가지 원천]고 말한 베르그송 은 전쟁이나 거대산업의 위험에 대해 '기계학이 부른 신비학'에 의해 더욱 강화된 정신이 맞설 것을 예언하고 윤리학의 새로운 사명을 암시했다. 그러나 학문에 관한 그런 희망이나 의무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의 방법적 전제는 생의 도약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아프리오리즘인데 충분히 철학적인 것일까?

 

현대 윤리학 가운데 특기할 것은 방법론적 자각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윤리학을 학문적으로 기초 짓고자 할 때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이 학문이 실천에 관계되기 때문에 구체적 개별자에 끌려 논리적 일반성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논리와 윤리의 이 같은 대립을 존재와 가치의 문제로 환원해서 방법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사람들이 신칸트파이다. 특히 마르부르크학파인 헤르만 코헨 의 [순수의지의 윤리학]은 수학적 방법을 따라 과학적 자연을 생산하는 순수사유와 비유해서 순수의지는 법률적 방법으로 행위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생각하고, 개인적 인격에서 시작해서 법인·국가·국제연맹 또는 국제연합이라는 원심적 계열에서 자각과 사회적 통제의 일치에 관한 이상실현의 정도를 단계 지웠다.

 

후설의 현상학이 형상적 환원 방법에 따라 보여준 본질 직관의 성과는 미학의 영역에서도 가치직관에 적용됐는데, 윤리학에서도 막스셸러 는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윤리학]에서, 또 니콜라이 하르트만 은 윤리학 에서 각각 현상학적 방법을 써서 윤리적 가치로서의 선이 가치 일반보다도 높다는 점을 주장하고 그 같은 가치실현에 작용하는 주체[셸러] 또는 기초가치 [하르트만]로서의 인격을 중시한다.

 

그러나 선은 좀 더 자세히 규정되어야 한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특기할 만큼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부를 만한 미래의 윤리학에 대한 서론"[윤리학 원론. 서문]을 시도한 조지 에드워드 무어 의 고찰이다. 그는 종래의 윤리학과 달리 "선은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고 윤리학의 기본원리에 관해, 그것이 선이라는 판단은 직관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윤리적 명제가 '증명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며 윤리적 직관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바른 직관을 행하는 방법은 선인가 아닌가를 조사하고 싶은 대상을 다른 사상관련에서 절대적으로 떼어놓는 것으로써 해당 대상을 유기적 전체 속에서 부여된 의미로부터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메타율리학 에서 C. L 스티븐슨은 윤리를 명령법의 논리로 본다. 그러나 내용은 묻지 않는다. 이 선의 무 내용성은 다른 형태로 20세기 윤리사상의 한 지도적 조류가 되어 있는 실존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양심은 내용 없는 부름에 불과하다고 보는데 그 무 내용성은 부담이라는 불안을 매개로 죽음에의 선구적 결의 성을 가져온다. [존재와 시간] 때문에 그런 부름이야말로 실존의 윤리적 자각 자체이다. 이것들은 결국 가치의 다양성을 따라 분열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선의 구체적인 지표가 보편적 차원에서는 상실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존의 보편적 일원화를 거부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존재와는 따로[1978]에서 윤리적 주체를 절대적 개체인 무한자의 보증이라고 본다.